"이제 그만 놀고 공부해야지."
분명 아이도 알겠다고 했는데 좀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10분이 지나도 그대로이고, 다시 이야기하면 "조금만 더!"라고 하거나 갑자기 짜증을 냅니다.
여행이나 방학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는 이런 모습이 더 심해지기도 합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평소보다 예민해지고, 공부를 시작하기 싫어하거나 일상의 생활 리듬을 되찾는 데 며칠이 걸리는 아이도 있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충분히 놀았는데 왜 공부를 시작하지 못할까?'
'여행까지 다녀왔는데 왜 더 짜증을 내는 걸까?'
'우리 아이가 너무 게으른 건 아닐까?'
하지만 아이가 어떤 일을 끝내고 다음 행동으로 넘어갈 때마다 유난히 힘들어한다면 단순히 게으름이나 의지 부족의 문제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가 어려워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끝내고 다음 행동으로 넘어가는 '전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에게도 비슷한 모습이 보인다면, 단순히 게으르다고 생각하기 전에 그 이유를 먼저 살펴보세요. 아이가 전환을 힘들어하는 이유와 부모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하나씩 알아보겠습니다.
전환이란 무엇일까요?
전환은 한 활동을 끝내고 다른 활동을 시작하는 과정입니다.
놀다가 공부하기, 게임을 끄고 밥 먹기, TV를 끄고 씻기,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기처럼 아이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 전환을 경험합니다.
어른에게는 "하던 일을 그만하고 다른 걸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기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단순히 몸을 움직여 자리를 옮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현재 집중하고 있던 것을 멈추고, 관심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다음에 해야 할 일을 떠올린 뒤 실제 행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특히 재미있는 활동에서 해야 하는 활동으로 넘어갈 때는 더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 게임 → 숙제
- 놀이 → 공부
- 여행 → 일상
- 방학 → 학교
상황은 다르지만 모두 지금의 상태를 멈추고 새로운 상태로 이동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왜 시작이 힘들까요?
전환에는 실행기능이 관여합니다.
실행기능은 해야 할 일을 계획하고 시작하며, 주의를 조절하고, 상황에 따라 행동이나 생각을 바꾸는 데 필요한 여러 능력을 말합니다.
이런 능력은 아이가 성장하면서 계속 발달합니다.
따라서 어른에게는 간단해 보이는 행동도 아이에게는 더 많은 조절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이가 재미있는 놀이에 깊이 몰입하고 있다면 더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블록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이의 머릿속에서는 '다음에는 뭘 만들까?', '이 블록을 어디에 놓을까?'라는 생각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부모가 말합니다.
"이제 그만하고 수학 문제집 풀어."
부모에게는 자리만 옮기면 되는 일이지만 아이에게는 하던 생각과 행동을 멈추고, 전혀 다른 활동에 주의를 돌려 다시 시작해야 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막상 책상에 앉으면 공부를 하는데 책상에 앉기까지 유난히 오래 걸리는 아이라면 공부 자체뿐 아니라 '시작'과 '전환'이 어려운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환이 더 어려운 이유
모든 아이가 같은 정도로 전환을 힘들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아이는 하던 활동에 깊이 몰입해서 중간에 멈추는 것을 특히 어려워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이나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불편하게 느끼는 아이도 있습니다.
피로와 수면 부족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아이가 피곤하면 평소에는 어렵지 않았던 작은 변화에도 짜증을 내거나 다음 행동을 시작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또 해야 할 일이 너무 크거나 막연하게 느껴져도 시작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공부해."
라는 말보다
"수학 문제집 펴고 첫 문제부터 해보자."
라는 말이 훨씬 구체적인 이유입니다.
따라서 아이가 전환을 힘들어한다고 해서 하나의 원인으로 단정하기보다는 몰입 정도, 피로, 수면, 감정 상태, 해야 할 일의 난이도와 실행기능 등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여행 후 더 짜증내는 이유
여행을 다녀온 다음 아이가 유난히 예민해지는 모습을 경험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여행을 즐겁게 다녀왔으니 오히려 기분이 좋을 것 같은데, 집에 돌아오면 공부를 하기 싫어하고 평소보다 짜증이 많아집니다.
왜 그럴까요?
여행 중에는 평소와 생활 패턴이 크게 달라집니다.
늦게 자기도 하고 새로운 곳을 방문하며, 평소보다 자유롭게 시간을 보냅니다. 학교나 학원, 숙제에서도 잠시 벗어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행이 끝나면 다시 기상시간, 학교, 학원, 숙제, 취침시간 같은 일상의 규칙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어른도 휴가가 끝난 다음 날 출근하는 것이 유난히 힘들 때가 있습니다.
아이 역시 여행 모드에서 일상 모드로 다시 전환하는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여행 중 수면시간이 달라졌거나 이동으로 피로가 쌓였다면 평소보다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워지고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행 후 아이가 공부를 바로 시작하지 못한다고 해서
"며칠 놀더니 완전히 게을러졌네."
라고 판단하기보다는 아이의 몸과 생활 리듬이 아직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인지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모습이 반복되나요?
전환이 어려운 아이에게는 다음과 같은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 놀이나 게임을 끝내라고 하면 짜증을 냅니다.
- "5분만 더"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 숙제를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 갑자기 일정이 바뀌면 예민해집니다.
- 여행이나 방학 후 생활 리듬을 되찾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 다음 행동을 여러 번 이야기해야 움직입니다.
- 일단 시작하면 잘하는데 시작하기 전까지 부모와 실랑이가 반복됩니다.
몇 가지가 해당한다고 해서 아이에게 특별한 문제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피곤하거나 잠이 부족할 수도 있고, 공부가 어렵거나 단순히 하기 싫어서 미루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번의 행동보다 어떤 상황에서 비슷한 모습이 반복되는지 패턴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부모가 도와주는 방법
전환이 힘든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계속되는 재촉보다 다음 행동을 예상하고 준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1. 미리 예고해주세요
아이가 한창 놀고 있는데 갑자기
"당장 그만하고 공부해."
라고 하면 전환이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대신 종료 시간을 미리 알려주세요.
"20분 더 놀고 숙제하자."
그리고 시간이 가까워지면
"10분 남았어."
"이제 5분 남았어."
처럼 다시 알려줄 수 있습니다.
휴대전화나 타이머를 활용해 아이가 직접 시간을 확인하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예고 → 준비 → 종료 → 다음 행동
이라는 과정이 반복되면 갑작스럽게 활동을 빼앗긴다는 느낌도 줄어듭니다.
2. 시작을 작게 만들어주세요
"공부 시작해."
라는 말보다
"책상에 앉아서 수학 문제집부터 펴보자."
처럼 첫 행동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세요.
아이가 특히 시작을 어려워한다면
"첫 문제까지만 해볼까?"
처럼 문턱을 더 낮출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한 시간 공부를 생각하면 부담스럽지만 문제집을 펴는 행동은 훨씬 쉽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전환이 어려운 아이에게는 오래 하는 것보다 일단 시작하는 것이 먼저일 수 있습니다.
3. 스스로 끝내게 해주세요
부모가 매번 TV를 끄거나 게임기를 빼앗으면 활동은 끝낼 수 있지만 아이가 스스로 전환하는 경험은 줄어듭니다.
가능하다면
"알람이 울리면 네가 직접 끄는 거야."
라고 미리 약속해보세요.
아이가 직접 종료 버튼을 누르고 정리한 뒤 다음 행동으로 이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잘되지 않더라도 반복하면서 스스로 멈추고 시작하는 경험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4. 생활 루틴부터 회복하세요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는 밀린 공부가 먼저 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피곤하고 수면 리듬까지 흐트러져 있다면 공부에 집중하기가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기상시간, 식사시간, 취침시간 등 기본적인 생활 리듬부터 평소 상태로 되돌려 주세요.
특히 긴 여행이나 방학이 끝난 뒤에는 모든 일정을 한꺼번에 원래대로 돌리기보다 짧은 완충 시간을 두고 일상의 루틴을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 좋습니다.
5. 짜증 직전을 살펴보세요
아이가 짜증을 내면 부모는 자연스럽게 화낸 행동부터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짜증을 내기 직전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 게임을 꺼야 했나요?
- 친구와 헤어져야 했나요?
- 숙제를 시작해야 했나요?
- 여행에서 돌아왔나요?
- 갑자기 예정이 바뀌었나요?
비슷한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짜증이 나타난다면 아이가 어떤 전환을 특히 힘들어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게으름으로 단정하지 마세요
아이에게 같은 말을 몇 번씩 해야 하고 숙제를 시작할 때마다 실랑이가 반복되면 부모도 지칩니다.
"왜 이렇게 게으르지?"
"왜 말을 안 듣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조금 바꿔보세요.
"왜 안 하지?"가 아니라 "무엇에서 무엇으로 넘어가는 것을 힘들어하고 있을까?"
아이가 어려워하는 것이 공부 자체가 아니라 공부를 시작하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여행 후 짜증도 단순히 여행이 끝나서 투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여행에서 다시 일상의 규칙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힘든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의 대응도 달라집니다.
더 많이 재촉하는 대신 미리 알려주고, 준비할 시간을 주고, 시작을 작게 만들어주고, 일상의 루틴을 다시 찾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물론 전환의 어려움이 매우 심해 학교생활이나 가족의 일상에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주거나, 작은 변화에도 극심한 불안이나 감정 폭발이 반복된다면 '전환이 어려워서 그렇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전문가와 함께 아이의 전반적인 발달과 정서 상태를 살펴보는 것도 좋습니다.
아이의 행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행동을 허용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이가 왜 힘들어하는지를 이해해야 그에 맞는 방법으로 행동을 가르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아이가 또 "5분만 더"라고 말한다면 바로 게으르다고 생각하기 전에 한번 살펴보세요.
어쩌면 아이가 어려워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지금의 활동을 끝내고 다음 행동을 시작하는 '전환'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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